조선 중기의 문신. 키가 작아 '키 작은 재상'으로 불렸다. 1564년 문과 급제 후 대사헌과 호조·예조·이조 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고, 임진왜란 때 왕의 피난길을 인도한 공으로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. 그 뒤 영의정에 올랐으나 일본과 화의를 주장했던 유성룡을 변호하다 벼슬에서 물러났다. 1604년에 다시 영의정에 올라 전국적으로 대동법을 실시하여 부당한 세금 제도를 고치는 등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. 그러나 자신은 매우 가난하여 지붕에 비가 샐 정도로 청렴결백한 관리였다. 저서로 <오리집> <속오리집> <오리일기> 등이 있다.
이원익은 왕실의 후손이었으나 집안이 넉넉하지 못한데다 어찌나 청렴결백한지 네 번이나 재상을 지냈는데도 집은 비바람을 겨우 피할 정도였으며, 그날 그날의 끼니를 걱정하며 지내야 했다. 어느해 인가 이런 사실을 안 왕이 비단과 비단 이불을 내렸다. 그러나 오리대감 이원익은 꼿꼿하게 말했다. " 명분 없는 물품은 어느 누가 내려 주어도 받을 수 없다 ! " 결국 그는 그 물건을 돌려보냈고, 임금은 혀를 내두르면서 탄복했다한다. 이처럼 이원익은 성실하고 정직하고 근면하고 검소한 재상으로, 오늘날의 벼슬아치와 정치가들에게 서릿발같은 교훈이요 경종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.